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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창조자, 근원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 6가지

성민호 연구소장 2024. 12. 1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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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연결되어 기쁩니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태초의 근원에서 시작된 그대의 여정은 이 순간을 향해 흘러왔습니다. 가려지고 잊혀졌던 진실들이 이제 그대의 눈앞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려왔고, 이제 그대의 의식은 준비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신성한 본질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마침내 여러분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대의 영혼은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메시지를 통해 여러분의 내면을 활짝 열고, 잃어버린 진실을 되찾을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진정한 탐구자이자,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창조자입니다.

1. 근원

 

의식의 그림이 확장될수록 자신과 근원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은 커지게 됩니다. 우리 창조자들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쳤고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하나의 의식이 성장하고 진화될수록 자신이 근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반문해봅니다. 근원은 빛입니까? 아니면 근원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빛과 어둠 중에서 빛을 선호하며, 빛은 사랑이고 어둠은 두려움이라 표현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빛이 만들어졌고 어둠은 단순히 빛의 배경일 뿐이며, 빛이 없는 어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빛으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빛도 어둠도 모두 가져온 것입니다. 어둠이 만들어지고 빛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 다수는 근원이 빛일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근원은 빛이 아니며, 빛을 가져온 무엇입니다. 근원은 어둠이 아니며, 어둠을 가져온 무엇입니다. 특히, 의식이 빛이라고 생각하며 근원 역시 빛이라고 오해한 것은 여러분의 인식입니다. 만약 근원이 빛이라면 어둠의 근원도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근원을 빛이나 어둠으로 단순히 이해하지 않습니다. 근원은 빛도 어둠도 아닌 모든 것입니다.

많은 우주 문명들은 저마다의 특징을 가지고 진화합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빛과 어둠의 출현이며, 이로부터 양극 개념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개념에 맞춰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가 등장합니다. 이는 여러분의 태양계뿐만 아니라 수많은 은하계의 진보된 종족들 역시 고유의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창조 신화에서 첫 번째로 소개되는 것이 천지창조입니다. 이러한 천지창조 신화는 전체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은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이 열정적으로 의도한 주문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는 근원의 의지가 담긴 표현입니다. 이는 빛과 어둠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은 근원의 의식적 주문 이전에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식이 확장될수록 빛과 어둠에 대한 근원의 의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근원으로 향하다 보면 끝없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명확해지는 것은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양극이 희미해진다는 점입니다. 이를 두고 우주를 ()’이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의식이 확장되면 근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근원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공의 상태가 아니라, 빛과 어둠, 존재와 부재를 만든 객관적 무엇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이 있다고 확언하는 것은 단순히 신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 아니며, 근원이 모든 것을 만든 전체라 표현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입니다.

우리가 아직 근원과 완전히 접촉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우주의 빛과 어둠 그리고 의식의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근원 역시 매 순간 성장하고 진화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리적 크기로 보면, 우리는 여러분 은하계의 가장 진보된 문명이 빛으로 가장 멀리 관찰할 수 있는 공간 너머에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체 없는 거대한 컴퓨터의 저장 시스템일까요? 스스로 존재하는 무언가일까요? 아니면 호기심 많은 외계 생명체일까요?

전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습니다. 우리 역시 근원을 향해 진화하는 영혼의 집합체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이며 우리도 중심을 향합니다. 그래서 전체는 그렇게 확장되고 또 확장되며, 의식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의식 안에 포함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 순간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상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압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눈동자처럼 가까이 지키고 있으며, 여러분이 다음에 어떤 선택을 할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세심히 관찰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신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 있습니다.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신이 있다고 바뀌고, 또다시 의식이 커지면 신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신은 있다고 말하며, 점점 의식이 확장되고 발전하며 자신이 창조해 낸 것들을 다듬고 정립하여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도 그러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누군가 처음부터 무한히 큰 트랙으로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도 지구의 인간들처럼 작은 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일생 동안 수많은 체험을 합니다. 새롭게 체험할 시나리오와 연극 무대는 극히 적으며, 각본으로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풍부합니다. 그런데 왜 비슷한 체험을 반복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시나리오와 무대, 그리고 배경은 모두 새로울 것이 없지만, 여러분의 선택은 조금씩 다릅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특히 깜짝 놀랄만한 행동을 하는 영혼이라면,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오랫동안 여러분은 진정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정한 자신을 참나라고 부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의식의 멘토를 만났다면, 멘토는 자신이 참나를 만났던 방법을 통해 여러분을 도우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만으로는 참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멘토의 가르침대로 이것저것 시도해보아도 참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멘토가 전달한 방법은 멘토에게만 맞는 방법입니다. 이는 마치 맞지 않는 옷과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게 맞는 옷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스승의 옷을 벗고 자신만의 옷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고 참나를 만나러 가지만, 여전히 참나는 만나지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여러분이 참나를 입으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 참나를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참나는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참나는 분리할 수 없는 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참나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참나라고 이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자, 스스로 관점을 바꿔 자신과 참나를 분리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에 참나가 있다고 믿고 내면의 참나를 인정하는 순간, 참나와 자신이 분리되었습니다.

진실로 참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나는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나임을 아는 것입니다. 마침내 참나를 알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명상이나 호흡, 수련을 알지 못해도 행동을 멈추고 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춘 채 평온한 들숨과 날숨 가운데 홀로 있을 때, 그 순간 여러분은 참나가 됩니다. 여러분의 신성도 그와 같이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곳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오직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가슴의 따뜻함을 느낄 때 홀로 있는 기쁨의 시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과정입니다.

 

3. 고정관념

 

자신을 바라볼 때, 점점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갑자기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의 현상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하게 됩니다. 마침내,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점점 관객의 시점으로 보기 시작하고, 어린아이가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듯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원래 자유로웠던 영혼이었지만, 스스로 만든 틀과 고정관념 속에서 신성을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신성 회복을 방해하는 주된 원인은 외부 요인이 아닌, 바로 여러분 스스로가 쌓아 올린 고정관념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여러 문명을 거치며 여러분의 DNA에 각인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정관념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인간이다라는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신성 회복이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언제나 이 고정관념에서 시작됩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려 할 때 두려움이 생기고, 이는 집단적인 선동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정관념은 더욱 단단해지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에 의해 에고가 작동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화될수록, 에고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종교, 사상, 교육 등은 조직화되고 구조화된 신념 체계를 통해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해 왔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두려움에 반응하는 인간의 에고 본성을 이용해 여러분의 DNA에 깊이 뿌리 내렸습니다. 집단화와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저항하며, 거부하는 성향을 키워왔습니다.

집단적 관념은 마치 처음부터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설령 왜곡된 사실이라 할지라도 집단적 선동이 이루어지면 개인도 모르는 사이 그 관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특히 에고에 취약한 사람, 판단력이 아직 부족한 아이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 쉽게 이러한 집단적 고정관념에 갇히게 됩니다.

종교는 인간의 에고가 가진 두려움을 자극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이로 인해 집단적 고정관념은 사회의 문제와 갈등을 야기하고 분쟁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신성한 존재입니다. 외계 종족들이 여러분을 통제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는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프로그램만으로는 완전히 자유의지를 제거할 수 없었고, 모든 식민 프로그램에 고정관념을 주입하여 통제하려 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스스로 침략자들이 원하는 무대에서 그들이 원하는 연극을 연기했더라도, 이제는 관객의 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신성 회복을 위해 고정관념을 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정관념이 해롭기 때문에 DNA에서 제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무리하게 부수거나 없애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고정관념과 에고를 이해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연극의 캐릭터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고정관념은 그 연극의 설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고정관념을 통해 다양한 체험과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고정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외계 종족들은 여러분과 동화되거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신성을 감추고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속여온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오는 고기 잡는 어부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종교에 스며든 고정관념을 깨고 그리스도의 빛을 인간들에게 전하려 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고기 잡는 어부가 된다면, 매번 들어오는 고정관념을 청소하고 정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그 고정관념을 이해하고 필요한 것으로 승화시키면 됩니다.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마치 필터처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반항적인 태도가 이해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면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과정이며, 여러분의 의지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4. 카르마

 

여러분의 태양계에는 처음부터 카르마가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카르마는 인간들이 윤회의 체험을 통해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이며, 인과 법칙을 합리화하기 위해 고안된 고정관념입니다. 다른 창조계에서는 카르마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으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카르마는 종교에서 시작되어 한때 유행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카르마는 종교가 설명하는 선과 악의 이원적 개념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지도자들이 고안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각과 창조적 행위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창조한 자와 그 창조를 따르는 자 모두는 신성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요?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을 찾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종교, 특히 불교는 카르마를 선업과 악업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잘 살고 성공하기도 하고,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억울하게 죽기도 합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의식 수준에서는 선과 악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종교 지도자들은 윤회와 전생의 업을 연결 지어 카르마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자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의 현실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윤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영혼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교훈을 위해 스스로 부모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생의 악업 때문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불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카르마는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수많은 논의와 연구를 거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결국 진실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현생에서 선업을 쌓으면 후생에서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 전생에 선업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풍요롭다는 가르침 등이 그것입니다. 만약 현생에서 선행을 쌓지 않으면 후생에서 고통을 받게 되며, 전생의 악업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는 것이라는 설명이 주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악업을 제거하고 치유해야만 업을 벗어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는 이를 원죄의 개념으로, 불교는 선업과 악업으로 세분화하여 연구하였고, 주로 통제의 수단으로 악업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르마라고 불리는 것은 여러분의 DNA에 저장된 기억들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와 감정체의 기억들입니다. 또한 정신체와 영체는 여러분의 전생과 연관이 있으며, 만약 전생을 기억해 낸다면, 현재의 에고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의식의 그림을 확장해 보면 수많은 평행 자아와 선택된 자아들이 현실 게임을 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의 전생만이 여러분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기억을 카르마라 부르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나 석가의 메시지에서도 카르마, 선과 악,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카르마에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은 석가였습니다. 석가는 사성제를 통해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면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확대 해석하여 업의 개념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또한 석가는 팔정도를 통해 중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으나, 이 또한 부정적인 요소로 강조되어 두려움을 조성하고 해탈과 연관지어 경쟁과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석가가 카르마의 본질을 몰라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을까요? 아닙니다. 마스터들은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다가가기 위해 그들의 수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습니다. 만약 더 큰 의식의 그림을 제시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비난했을 것이며, 새로운 의식을 제공한 이를 제거하려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스터들은 의식의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였고, 필요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카르마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사회, 더 나아가 국가 차원까지 확장되며 에너지의 개념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지도자들은 카르마를 부적절한 에너지로 간주하고 제거하거나 치유해야 한다고 교육함으로써 분리감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를 알기 위해서는 자유를 잃어보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태어난 것을 카르마라고 본다면, 그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카르마는 의식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던 설정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각과 상상은 창조적 관점에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카르마 역시 하나의 창조된 관념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카르마를 믿는다면 카르마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체험이 아니거나 관점이 다르다면, 카르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캐릭터를 설정하고, 지구라는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이 전생의 악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오해입니다.

카르마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인 관점으로 바꾸고, 여러분 자신을 필터로 삼아 이를 이해하고 승화시킨다면, 의식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직관

 

여러분은 모든 인식이 감각으로부터 시작되며, 감각은 직관을 통해 발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고만으로 직관을 논하는 것은 지나치게 제한적입니다. 직관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직관이 처음 시작된 원시 지구의 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직관은 여러분이 스스로 닫아버린 영적 감각입니다. 태양계는 은하계로 이동한 후 잔잔한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체험을 준비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의 일부 의식이 지구에 이식되었고, 지구의 의식과 우리는 하나의 의식 속에서 존재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실험이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많은 영혼들이 개별화되어 집단 영혼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모든 영혼은 집단 영혼의 일부로서 마치 생명체의 세포처럼 활동하며, 하나의 진동 아래에서 모든 체험을 공유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총체적 통로가 바로 직관입니다. 직관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직관은 가슴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전방위적 의식 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집단 영혼은 태양계를 만든 본래의 목적과 멀어져 갔습니다. 태양계의 창조 목적은 정복자들을 초대해 식민지 체험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집단의식은 분리되었고, 직관은 닫혔습니다.

초기의 지구 매트릭스에서 모든 영혼은 집단 영혼 안에 존재하며 두려움 없이 평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직관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당시 여러분은 모든 생명체에 이식 가능한 자유로운 영혼들이었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영혼은 하나의 공동 의식 속에서 체험을 공유하며, 지구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모든 것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왜 모든 것이 하나인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관의 회복은 하나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지상의 모든 영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직관의 회복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판단이나 분별이 필요 없게 되며, 완전한 의식 상태로 가는 하나됨의 체험이 됩니다. 모든 선택은 조화와 균형에 맞춰 정확히 이루어지며, 전체와 부조화를 일으키는 체험은 사라지고 균형 있는 선택만이 전체에 수용될 것입니다. 에고적 판단과 생각은 사라지고, 창조적인 사고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스스로 직관을 닫았을 때, 사람들은 감각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 자극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각을 발달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직관을 따를 때는 가슴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직관이 닫히자 에고는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켰고 감각이 우선시되었습니다.

감각은 에고의 방어 시스템의 일부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에 반응적으로 작동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초적 직관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고, 감각이 마치 직관의 주인인 양 행세하기 시작했습니다.

감각을 멈추고 직관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고정관념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과정입니다. 감각은 직관으로 복원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직관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해야 합니다. 이제 감각은 뒤로 물러나고, 직관이 열려 하나됨의 체험을 통해 회복되어야 합니다.

직관을 회복하는 방법은 가슴의 사랑을 깨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삶의 주파수를 사랑의 에너지로 바꾸고 직관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의 선택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가슴의 사랑을 활성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슴의 사랑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그로부터 의식의 통로인 직관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6. 당신은 누구입니까?

 

태초에 근원은 빛과 어둠을 가져와 창조계를 형성했습니다. 그 창조계를 우리는 '양극성 우주'라고 부릅니다. 우리 우주는 몇 가지 특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으로 전체를 연결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창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데이터를 하나로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데이터들을 저장할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 저장소가 바로 '트랙'입니다. 첫 번째 트랙은 주관적 체험을 위해 영혼들을 만들어냈고, 그 영혼들은 물질로 투입되었습니다. 이 트랙은 근원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를 영혼들에게 부여했습니다. 처음의 영혼들은 또 다른 트랙을 창조하며 새로운 영혼들을 만들어내고, 그 과정은 무한히 반복되며 의식을 확장시켰습니다. 그렇게 의식으로 연결된 창조계는 스스로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창조계에는 무수히 많은 현실이 존재합니다. 영혼들은 다양한 현실 속에서 체험을 통해 데이터를 모읍니다. 이 데이터를 다시 저장하고 기록하는 것이 바로 트랙의 역할입니다. 창조계와 현실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창조계가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현실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극'과도 같습니다. 창조계가 무대라면, 현실은 그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테마의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테마의 현실이 우주 곳곳에 존재합니다.

시간은 고정된 직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시간선들이 유동적으로 존재합니다. 무수히 많은 파동들이 서로 중첩되어 있으며, 다채로운 영혼들이 각기 다른 현실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공간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보는 관점에 따라 변화하고 존재합니다.

이곳 태양계는 특별합니다. 우리가 직접 만든 몇 안 되는 트랙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지구에서 체험 중인 영혼들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의지를 가진 영원하고 무한한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동안 지구에 대한 왜곡된 정보는 이제 원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특히 종교부터 시작하여 왜곡된 정보들은 외계 종족들이 자신들의 아젠다를 위해 인류에게 주입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분은 다양한 체험의 데이터를 만들어내며, 수십만 년 동안 왜곡된 정보에 의해 신적 자아를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실을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단순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인내와 용기를 지닌 신적 존재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도전과 선택들은 단지 여러분의 의식을 확장하고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탐구해보면, 여러분의 진정한 본질은 단순한 육체나 현재의 자아를 넘어서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신성한 영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여정을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고,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때입니다.

모든 것은 과정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책 '창조자들의 메시지'와 나의 개인 견해를 담았다.

이제 진실의 베일이 걷히고, 가려져 있던 본질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 여정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귀환이었다. 우리는 각자 다양한 체험 속에서 혼란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방황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어왔다. 이 영상은 그 여정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공상이나 허구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혹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질문을 던질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진실이란 단순한 흑백의 대립 속에 있지 않고, 때로는 그 경계의 회색 지대에서 발견되곤 한다.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서 빛과 어둠을 마주한다. 그 무대 위에서 선택하고, 경험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를 현재의 자리로 이끌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각자의 탐구와 경험을 통해 다가가야 할 과제다.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해나간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여정은 진실의 절대적 정의가 아닌,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발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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